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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으로 바라본 경제한파

2222008-12-18 00:00:00조회 65222

저는 와인을 좋아하는 시애틀의 우체부입니다.

 

손에 우편물을 들고 길을 가다가, 매거진 스탠드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얼핏 와인 스펙테이터 잡지 표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와인에 대해 가장 충실한 정보가 담겨 있다는 잡지입니다.  '저렴한...' 어쩌구 하는 굵은 제목만 눈에 띕니다. 뒤적거리고 볼까 하다가, 일하는 중이어서 그냥 지나칩니다. 일 끝나고 집에 오니 푸드 앤 와인 잡지가 배달되어 있습니다. 흠, 기사 중에 맛있는 돼지 어깨살 스튜를 만드는 법이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조그맣게 사족이 붙어 있습니다. "돼지 어깨살은 값싸면서도 맛있는 부위이다." 세상이 갑자기 모두 절약모드로 들어선 듯 합니다. 그리고 거기엔 위아래도 없습니다.

 

최고급 와인값들이 떨어지는 게 눈으로 보입니다. 과거 엄청난 바람이 들어갔던 와인들이, 지난해 대비해 거의 절반까지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와인들을 코스트코 가서 사둘 생각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살아남는 것'이 문제이지, '무얼 폼재며 마실 것인가' 라는 것은 부차도 아닌, 그저 사치에 불과합니다.

 

주위에 한참때 잘 나가던 친구들이 쓰러지는 것을 봤습니다. 은행에 다니며 은행 고문 변호사를 맡았던 친구 하나가 엊그제 해준 말입니다. 이 친구 역시 와인을 배운 후 프랑스의 유명한 와이너리(양조장)들을 들락거리며 워싱턴주 동부에 포도밭을 사네 마네 하던 친구입니다. 그 친구를 우연히 길에서 만났습니다.

"휴우... 엊그제 잡페어 갔다 왔는데, 이거 생각보다 더 심하네."

그 친구가 잡페어 다녀 왔을 정도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로 내몰린건지 안 봐도 대략 알 만 합니다. 하긴, 워싱턴 뮤추얼에서만 4천명이 넘는 감원을 했으니, 보이지 않는 다른 분야 및 관련 분야에서의 추가 감원이란 게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지는 안 봐도 뻔한 문제입니다.

 

여기에, 이곳에서 와인을 배우던 유학생이나 혹은 지상사 직원들, 와인 매출에 상당히 도움을 주며, 혹여 이곳에서 와인 모임을 열겠다 하면 이메일로 열심히 물어보며 참석을 외치던 이 사람들도, 이제는 참석 못합니다. 한국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경우, 와인 값이 조금 떨어졌다 해도 이미 환율폭탄의 덕에 그들이 옛날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와인조차 살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와인, 특히 좋다고 소문난 와인들은 정치적인 술임과 동시에 경제 지표의 반향이 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다섯 와인, 이른바 '오대 샤토(샤토 무통 로실드, 라피트 로실드, 라투르, 마고, 오브리옹)'에 끼인 거품들은 지금부터 빠질 것입니다. 그들의 가격과 품위를 동시에 유지시켜주던 월스트릿의 잘나간다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길가로 내몰린 상황입니다. 돈냄새 나는 곳이면 진동했던 오대샤토의 향기와 코히바 시가의 냄새 따위는 이미 과거의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트레이더 조에서 그들의 OMR로 나오는 와인들이, 월마트의 와인들이, 코스트코의 와인들이 매출량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가격 대비 맛있는 와인. 과거엔 볼 수 없었던 이런 주제들이 와인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와인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제가 일하는 시애틀 캐피털 힐 지역에서 최근 와인샵을 연 데이브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와인샵 'Vino Verite'의 주인인 그는 "추수감사절 이후 본격적으로 와인이 안 팔린다"고 말합니다. 크리스마스 경기는 이미 실종입니다. 시애틀의 경우 더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황금 성수기에 폭설이 퍼부어버려 사람들은 더욱 집에 꽁꽁 묶여 있는 형편입니다. 거기에 8년만에 찾아온 한파로 와이너리들조차도 생존의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문 닫은 와이너리들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한달이면 서너 개의 새로운 와이너리가 생긴다고 할 정도로 와인 바람이 불던 워싱턴주입니다. 이제 그 거품들이 빠지면서, 이 불황의 한파는 워싱턴주 와인산업 전체에 큰 타격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상태로 계속 간다면, 결국 지금까지 거품으로 살아왔던 미국 와인 업계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와인 가격은 하락세를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미국의 경우, 와인 주소비자층이라 할 수 있었던 미국 중산층의 명약관화한 붕괴는 결국 와인업계의 재편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아마 브롱코나 갤로 등 저가와인을 주 품목으로 해 왔던 대형와이너리들은 상대적으로 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명하다는 캘리포니아 나파나 소노마의 부티크 와이너리들? 아마 이번에 대략 정리가 될 것입니다.

 

이미 제 주위에서 고가의 '스택스 립'이나 '그리크 힐' 같은 이른바 '나파 밸리'산 샤도네로 연말파티를 해 오던 친구들이 이보다 낮은 가격의 와인인 프란시스칸 오크빌 같은 것들을 사들고 모임에 나가는 모습들도 봅니다. 올해 제가 살고 있는 워싱턴주에 찾아온 한파는, 날씨 뿐 아니라 개개인의 현실에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게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시애틀에서....

 

 



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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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os249100
· 17y ago
우리나라 와인 수입양은 전년대비 80%줄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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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__
garanti00
· 17y ago
와인잔 한잔 그 이후는...설탕을 섭취하는 거와 같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뭘 그렇게 보여줄게 있다고 보여주고 살려고 아등 바등 될까...정작 좋은 친구 한명이 필요한데...한잔 이상은 설탕물과 같은 와인과 벤츠등 고급차에 미쳤던 많은 사람들...세상은 이미 바꼈다는 걸 언제쯤들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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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__
grjkomo00
· 17y ago
한국의 경우에도 이번 금융위기 여파로 강남의 중상류층들이 제일 심하게 타격을 입었고 이명박이의 때와 장소를 못가리는 공기업감원과 공무원감축이 기다리고 있어 당분간 사치품의 소비는 타격이 심할거라 봅니다. 이번 위기가 한국에서 다른 위기와 다른 점은 일단 좀 산다하는 사람들이 상당한 타격입었다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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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준00
· 17y ago
와우... 추천 꾹~ 입니다. 좋은 글입니다. 미국에 사시는데 문장도 완벽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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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벙이00
· 17y ago
시애틀이면 벤쿠버 옆동네인데- 여기 벤쿠버는 아직 저 정도는 아닌데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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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앨리스00
· 17y ago
담백하고 차분하지만 글쓴님의 진솔한 마음이 느껴져서 더 가슴에 와닿네요.여긴 내일 아침 9시부터 스노우스톰이 온다고 하는데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눈이 오다말다 할건가봐요...크리스마스 바로 전의 대목 위크앤드인데말이죠~돈도 돈이지만 날씨까지 이러니 이래저래 꽁꽁 집에 묶여있게 생겼습니다.휴우~ 눈길 조심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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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__
비판적사고00
· 17y ago
동감합니다. 저도 와인 깨나 좋아하는데, 미국에서 살다보니 와인 값부터 줄이게 되더라구요. 와인 먹어본 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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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__
moment of truth00
· 17y ago
와우...미국에 사시면서 한국에 사는 사람들만큼 한국어를 많이 쓰실것같진 않은데 상당한 필력이네요. 당장 신문에 올려도 손색없을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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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__
오늘00
· 17y ago
글쓴이 권종상님은 이미 다음 와인카페에서도 좋은 글과 해박한 와인지식으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우체부 이전에 기자로 활동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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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mkw5400
· 17y ago
문제는 미국 살아도 영어 수준이 한국어 수준의 반도 안되니 미국 살면서도 미국소식을 미국 매체가 아닌 한겨례 같은 한국 매체를 통해 얻고 왜곡된 정보를 올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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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00
· 17y ago
이양반은 그저먹고 남 헐뜬는게 직업입니다 이런인간 때문에 순수한 사람 눈물흘리게합니다, 도대체 인간 심보라곤 쓰레기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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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oo00
· 17y ago
잘 아시지도 못하시면서, 이런 댓글을 올리시다니.. 이분의 영어 수준을 어떻게 댁이 이렇게 잘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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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00
· 17y ago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와인이 사치 품목인지 몰라도 유럽에서는 문화입니다. 유행에 흔들리지 않죠.. 가격대로 본다면 독일에선 2-3유로대의 와인이 제일 잘 팔리고 있어요. 거품을 앉고 있었던 주택경기가 꺼졌다면, 엄청난 주류세나 유행에의해 거품을 낀 와인보다 착한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오길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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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사고00
· 17y ago
미국에서도 사치 품목은 아닙니다. 2-3유로까지는 아니지만, 5-9불 내외에도 좋은 와인들 많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도 못 마신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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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비00
· 17y ago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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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썅00
· 17y ago
글을 굉장히 잘 쓰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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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S00
· 17y ago
그런 의미로 오늘 와인 한병사서 다마시고 시름을 달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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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ley00
· 17y ago
글 마지막 대목에 주목이 가는데요."아마 브롱코나 갤로 등 저가와인을 주 품목으로 해 왔던 대형와이너리들은 상대적으로 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명하다는 캘리포니아 나파나 소노마의 부티크 와이너리들? 아마 이번에 대략 정리가 될 것입니다."지금 경제 한파가 단순한 경제한파가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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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쁘니00
· 17y ago
재밌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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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d-Sneak00
· 17y ago
카페에서만 뵙는데, 여기서 다시 뵙는군요. 항상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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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러브00
· 17y ago
곧 우리나라에도 좋게 말하면 와인과 같이 제품의 원가보다 가치에 치중을 두고 소비하던 거품이 사라질거라고 봅니다. 중간계층이 가장 먼저이겠지요.빈부의 격차가 커지면서 말이죠.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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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Young June00
· 17y ago
언젠가 올 것이 온 것입니다. 그간 와인에 낀 거품이 사라지는 거지요. 한국에서 와인값 정말 우습습니다. 그걸 다 돈 내고 마시는 사람들도 우습구요. 한국에서 와인문화는 정말 한 편의 코메디입니다. 어제까지 막걸리 마시던 사람들이 갑자기 와인에 대해 떠드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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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비타민00
· 17y ago
막걸리마시던 사람들 이야기가 왜나오죠?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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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 17y ago
정말 좋은 글이네요. 와인을 통해 본 미국 경제상황.. 예상외로 사태가 심각하군요. 사실 와인 붐 일어 와인도 투자의 한 종목이 된 적도 있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거부라도 하듯 어느새 와인 관련 업종이 위험 직종이 되어버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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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kwiz0100
· 17y ago
언제나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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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진00
· 17y ago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유명인사가 되셨군요, 추운 겨울이긴 합니다. 진작에 이렇게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 불황과 상관없이 와인은,,,,부티크 와이너리의 존재의 이유도 분명있지만, 과했던건 사실입니다. 건강하세요. 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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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__
카우보이00
· 17y ago
안녕하세요 !권종상님께서 전해주시는 시애틀 소식을 자주 접하고 있읍니다만,미국도 그렇게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군요.그러나 늘 세상은 변하고,그 고통은 도리어 활력소가 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고 생각합니다.화이팅 해야죠!!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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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이00
· 17y ago
님처럼 와인에 해박항 우체부는 처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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