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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형은 요즘 부동산 얘기를 안 한다

알로2026-04-23 16:39:44조회 15출처: ppomppu.co.kr

" 형은 요즘 부동산 얘기를 안 한다"

 

형은 항상 옳았다

(2013년 가을, 형이 서른한 살이던 해)

그 시절 준형(가명)이 형은 모임에서 제일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제일 '들을 가치 있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형은 아무 말이나 하지 않았다. 말하기 전에 항상 잠깐 멈췄고, 그 정지가

말에 무게를 실어줬다. 우리는 그 타이밍을 좋아했다.

 

2013년 가을, 논현동 뒷골목 고깃집.

신입 면접을 같이 봤던 동기 여섯 명이 4년 만에 다시 모였다.

삼겹살이 두 판쯤 지났을 때 누군가 말했다.

 

"나 청약 넣었어. 마곡."

 

그 한마디가 테이블 분위기를 바꿨다.

다들 젓가락을 내려놓고 "얼마야?" "경쟁률은?" 하고 물었고,

잠깐 조용해지더니 형이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사면 안 돼."

 

단호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형은 가방에서 A4 두 장을 꺼냈다. 진짜로. 고깃집에서.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한국 PIR 지수, 인구절벽 그래프.

"서울 PIR이 15야. 15. 서울 시민 월급 15년치를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아파트 한 채 산다고.

이게 정상이야? 도쿄가 거품 꺼질 때 PIR이 18이었어."

 

나는 그때 형을 다 믿었다.

형이 자신감 있게 말할수록 더 믿었다.

형은 연세대 경제학과 출신이었고, 부동산 관련 서적을 그때 이미 열 권 넘게 읽은 상태였다.

근거가 있는 사람 특유의 냄새가 형한테는 있었다.

 

"3년 안에 30퍼센트 빠져. 두고 봐."

 

마곡 청약 넣었던 동기는 멋쩍게 웃었다.

나머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그해 은행 예금을 3개로 쪼개고 전세를 연장했다.

강북구 미아동, 방 두 개짜리 빌라.

"좋은 집 싸게 전세 사는 게 지금 제일 나은 선택"이라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 나는 형의 논리를 복기했다.

설득력이 있었다. 정말로.

 

그리고 2014년이 지나고 2015년이 왔고,

아파트 값은 빠지지 않았다.

 

형은 계속 기다렸다

(2019년 봄, 형이 서른일곱 살이던 해)

형은 결혼을 2017년에 했다.

 

형수는 일산 출신이었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집 사는 걸 원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둘이 합치면 자기자본 4억이 넘었다.

강북 쪽이면 충분히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형은 기다리자고 했다.

 

"금리 올라가면 다 꺾여. 미국이 지금 금리 올리기 시작했어.

시차가 있어서 모르는 거야. 한국도 2년 안에 반드시 조정 온다."

 

형수는 알겠다고 했다. 형을 믿었으니까.

 

2019년 봄 모임.

이번엔 아이 돌잔치였다.

마포구에 산다는 친구가 "32평 전세 끼고 샀어"라고 말했다.

강동구에 신혼집 마련했다는 친구도 있었다.

노원에 매수했다는 친구도 있었다.

 

형은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술을 따랐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잠시 뒤 형이 말했다.

 

"갭투자 지금 위험한 거 알지?

전세가율 높은 데 갭투자했다가 역전세 나면 진짜 피 봐.

뭐, 근데 잘 됐으면 좋겠다."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근데 그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형의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저 말이 걱정인가, 위로인가, 아니면...'

 

생각을 거기서 끊었다.

 

형은 그해 전세를 옮겼다.

마포구 아현동, 준신축 오 피스텔 전용 59제곱.

"입지가 중요하잖아. 전세도 좋은 데 살아야지."

 

보증금 2억 7천.

예금 잔고는 여전히 건재했다.

 

2020년에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그해 집을 샀다.

 

형한테는 말하기가 좀 어색했다.

사고 나서 형 만났을 때 형이 먼저 물었다.

 

"너 집 샀다고?"

 

"응. 동대문 쪽으로."

 

"얼마에?"

 

내가 말하자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다."

 

그게 다였다.

 

우리는 그날 치킨을 시켜서 맥주를 마셨고,

부동산 얘기는 더 이상 안 했다.

형이 먼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아이 분유, 유모차 브랜드 얘기였다.

 

형은 요즘 부동산 얘기를 안 한다

(2025년 겨울, 형이 마흔셋이던 해)

형은 작년에 이사했다.

 

마포에서 은평구 쪽으로.

아이 학교 문제라고 했다. 학군이 좋다고.

새로 들어간 집 보증금은 5억 5천.

그동안 모은 돈의 대부분이 거기 묶였다.

 

나는 놀러갔다가 거실에서 잠깐 멈췄다.

 

책장이 있었다.

형이 2013년부터 2020년 사이에 샀을 부동산 책들.

《2013-2014 세계경제의 미렁,

《서울 부동산 경험치 못한 위기가 온다》,

《인구절벽이 온다》.

 

책등이 닳아 있었다. 여러 번 읽은 흔적이었다.

 

"형, 이 책들 아직 갖고 있어?"

 

형은 정리중인 박스를 들다 말고 돌아봤다.

 

"응. 왜?"

 

"아니, 그냥."

 

형은 다시 박스를 들었다.

아무 말 안 했다.

 

이제 모임에서 부동산 얘기가 나오면 형은 조용하다.

 

예전처럼 A4를 꺼내지 않는다.

3년 안에 빠진다는 말도 안 한다.

금리 얘기, 인구 얘기, PIR 얘기도 없다.

 

대신 형은 요즘 아이 영어학원 얘기를 많이 한다.

새로 산 카메라 얘기도 하고,

주말에 형수랑 다녀온 온천 얘기도 한다.

 

한번은 술이 좀 들어갔을 때 내가 물었다.

 

"형, 요즘 부동산 어떻게 봐?"

 

형이 잔을 내려놓았다.

 

잠깐 멈췄다.

예전에 말하기 전에 하던 그 정지.

 

"글쎄."

 

그게 다였다.

 

집에 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오래 생각했다.

 

형이 틀린 건지 맞은 건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형은 나쁜 선택을 한 게 아니었다.

게으른 것도 아니었다.

멍청한 것도 절대 아니었다.

 

그냥.

 

기다렸다.

믿었다.

계속 믿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더 이상 그 믿음을 입 밖에 내지 않게 됐다.

 

형이 이사간 집 거실에 이것저것 인테리어를 직접 했다고 했다.

형수랑 둘이 주말에 일산까지 가서 직접 사서.

"생각보다 재밌더라."

 

형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남의 집을,

자기 손으로.

 

나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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